바이블시론- 설국열차’와 구원열차 (201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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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1 16:38 조회3,80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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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가 대본을 쓰고 감독한 ‘설국열차’는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영화다.
그만큼 영화 전체의 주제는 물론이고 디테일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각종 상징장치가 가득하다.
봉 감독은 8년 전 홍대 앞 만화가게에서 불란서 만화가 원작인 ‘설국열차’를 읽다가 영화에 대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한다.
지구온난화를 막겠다고 대기에 냉각제를 뿌렸다가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다.
인류 멸종을 예상하고 윌포드가 만든 설국열차에 빙하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올라탔고, 열차는 17년간 직진하면서 지구 전체를 순환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문제는 간신히 무임승차로 꼬리 칸을 얻어 탄 사람들. 창문도 없고 전기도 없고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덩어리를 공급받기 전까지는 인육을 먹어야 할 정도로 비참하다.
인육을 먹으려는 커티스에게 자기의 팔을 잘라 준, 꼬리 칸의 정신적 지주인 길리엄의 지도를 받아 커티스는 기차의 심장부인 맨 앞쪽 칸을 장악하기 위해 폭동을 일으킨다.
허무의 시대에 비전을 봐야
열차야말로 우주의 축소판이며, 승객들이 칸에서 칸으로 이동할 수 없는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 갇혀있는 상태는 역사 이래 계속되어온 계층의 분화를, 커티스를 중심으로 앞 칸으로 점진적으로 밀고 올라가는
것은 인류의 계급 투쟁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봉준호는 이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한 인터뷰에서 그는 ‘설국열차’는 커티스가 한 아버지(길리엄)에게서 다른 아버지(윌포드)에게로 가는 여정이 기본 스토리라고 말했다.
열악하고 부당한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 열차 칸들을 차례로 폭력적으로 통과해 마침내 신성하고 전능해 보이기까지 한 엔진실의 새 아빠 윌포드를 만나러 갔지만 길리엄과 윌포드는 다르지 않았다.
온갖 희생을 치른 후에 조우한 윌포드, 그는 열차 안의 균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커티스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 않았던 길리엄과 묵계를 나누던 사이였다.
유토피아(Utopia)의 원뜻은 그런 장소는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다. 커티스가 찾고자 했던 이상향은 없었고, 신성하고 전능하고 영원한 엔진은 허구였다. 내적으로 붕괴된 커티스에게서 인류의 허무를 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제3의 인물, 열차의 보안 설계자 남궁민수를 만난다.
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꼬리 칸을 부수고 앞쪽으로 돌진하려는 커티스, 앞쪽으로 나가더라도 적절한 선에서 멈추고 열차 자체를 파행시켜서는 안 된다는 길리엄, 그리고 기존 시스템을 어떻게 해서라도
유지시키려는 윌포드, 이들은 모두 앞으로만 직진하려고 한 인물들인데 반하여 남궁민수는 옆으로 튕겨나간다. 다른 이들은 오직 열차 안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데, 남궁민수는 자주 밖을 바라본다.
커티스는 몸은 앞 칸으로 왔지만 정신은 과거의 꼬리 칸에 갇혀 있다.
하지만 남궁민수는 시스템 자체를 뛰쳐나가 전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 체제에 저항하고 또 순응하지만 여전히 체제 안에 사고가 밀폐된 사람들과 달리 남궁민수는 자신은 죽어가며 열차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젖힌다. 바로 거기에서 제1세계의 백인이 아닌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한국인 요나와 흑인 토미가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설원의 북극곰을 바라보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살신성인하는 사람이 필요해
정치나 종교나 혁명과 개혁을 반복해서 시도해왔지만 겨우 길리엄에서 윌포드라는 한 사람의 두 얼굴을 만난 것밖에는 되지 않는 이 허무와 상실의 시대에, 한 시스템이 한계에 봉착할 때마다 전혀 새로운 비
전을 볼 수 있는 남궁민수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가 살신성인으로 설국열차의 문을 파쇄하는 장면에서 불현듯 예수님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설국열차가 아닌 구원열차이신 예수님이!
그만큼 영화 전체의 주제는 물론이고 디테일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각종 상징장치가 가득하다.
봉 감독은 8년 전 홍대 앞 만화가게에서 불란서 만화가 원작인 ‘설국열차’를 읽다가 영화에 대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한다.
지구온난화를 막겠다고 대기에 냉각제를 뿌렸다가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다.
인류 멸종을 예상하고 윌포드가 만든 설국열차에 빙하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올라탔고, 열차는 17년간 직진하면서 지구 전체를 순환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문제는 간신히 무임승차로 꼬리 칸을 얻어 탄 사람들. 창문도 없고 전기도 없고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덩어리를 공급받기 전까지는 인육을 먹어야 할 정도로 비참하다.
인육을 먹으려는 커티스에게 자기의 팔을 잘라 준, 꼬리 칸의 정신적 지주인 길리엄의 지도를 받아 커티스는 기차의 심장부인 맨 앞쪽 칸을 장악하기 위해 폭동을 일으킨다.
허무의 시대에 비전을 봐야
열차야말로 우주의 축소판이며, 승객들이 칸에서 칸으로 이동할 수 없는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 갇혀있는 상태는 역사 이래 계속되어온 계층의 분화를, 커티스를 중심으로 앞 칸으로 점진적으로 밀고 올라가는
것은 인류의 계급 투쟁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봉준호는 이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한 인터뷰에서 그는 ‘설국열차’는 커티스가 한 아버지(길리엄)에게서 다른 아버지(윌포드)에게로 가는 여정이 기본 스토리라고 말했다.
열악하고 부당한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 열차 칸들을 차례로 폭력적으로 통과해 마침내 신성하고 전능해 보이기까지 한 엔진실의 새 아빠 윌포드를 만나러 갔지만 길리엄과 윌포드는 다르지 않았다.
온갖 희생을 치른 후에 조우한 윌포드, 그는 열차 안의 균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커티스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 않았던 길리엄과 묵계를 나누던 사이였다.
유토피아(Utopia)의 원뜻은 그런 장소는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다. 커티스가 찾고자 했던 이상향은 없었고, 신성하고 전능하고 영원한 엔진은 허구였다. 내적으로 붕괴된 커티스에게서 인류의 허무를 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제3의 인물, 열차의 보안 설계자 남궁민수를 만난다.
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꼬리 칸을 부수고 앞쪽으로 돌진하려는 커티스, 앞쪽으로 나가더라도 적절한 선에서 멈추고 열차 자체를 파행시켜서는 안 된다는 길리엄, 그리고 기존 시스템을 어떻게 해서라도
유지시키려는 윌포드, 이들은 모두 앞으로만 직진하려고 한 인물들인데 반하여 남궁민수는 옆으로 튕겨나간다. 다른 이들은 오직 열차 안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데, 남궁민수는 자주 밖을 바라본다.
커티스는 몸은 앞 칸으로 왔지만 정신은 과거의 꼬리 칸에 갇혀 있다.
하지만 남궁민수는 시스템 자체를 뛰쳐나가 전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 체제에 저항하고 또 순응하지만 여전히 체제 안에 사고가 밀폐된 사람들과 달리 남궁민수는 자신은 죽어가며 열차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젖힌다. 바로 거기에서 제1세계의 백인이 아닌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한국인 요나와 흑인 토미가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설원의 북극곰을 바라보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살신성인하는 사람이 필요해
정치나 종교나 혁명과 개혁을 반복해서 시도해왔지만 겨우 길리엄에서 윌포드라는 한 사람의 두 얼굴을 만난 것밖에는 되지 않는 이 허무와 상실의 시대에, 한 시스템이 한계에 봉착할 때마다 전혀 새로운 비
전을 볼 수 있는 남궁민수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가 살신성인으로 설국열차의 문을 파쇄하는 장면에서 불현듯 예수님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설국열차가 아닌 구원열차이신 예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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