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스마트폰과 우상숭배(2012.8.16)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1 16:14 조회3,531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일전에 끝난 런던올림픽을 즐기는 데 스마트폰 덕을 톡톡히 봤다. 언제 어디서나 손바닥에 올려놓고서 실시간 중계를 볼 수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과 메일 송수신은 기본이고, 동영상과 사진의 촬영 및 편집, 무엇보다도 자신이 원하는 각종 앱을 골라 설치하고 사용할 수 있다.
와이파이나 3G를 활용해 이동하면서도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 목적지도 찾고, 대중교통 시간도 확인하고, 책도 읽고, 메모도 하고, 금전거래도 한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전국의 부동산 정보를 손쉽게 조회할 수도 있게 됐다. 이토록 똑똑한 스마트폰의 국내 사용자가 이달 중순이면 30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앉으나 서나 스마트폰을 손에 달고 다니는 이들이 도처에 퍼져 있다.
스마트폰 알람소리로 잠을 깬 뒤 툭툭 치고 쓱쓱 문지르기 시작한 스마트폰을 밥을 먹으며, 길을 걸으며, 화장실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에도 하염없이 만지작거린다.
하물며 병실 침대에 누워서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환자도 있다. 사정이 이럴진대 이제 스마트폰보다 더 지독하게 떠받드는 우상도 없을 것이다.
청소년 10명 중 6명 이상은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감을 느낀다고 한다. 스마트폰 중독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갈 추세다.
스마트폰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못한다. 하지만 모든 기계문명이 그렇듯이 스마트폰에도 치명적인 부작용이 따른다.
어린이나 청소년의 경우 유해한 성인 사이트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잠시라도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초조해지는 스마트폰 금단현상도 나타난다.
가족간에 살가운 대화와 접촉이 끊어진 지도 오래다. 중독과 소통의 단절, 차가운 기계 노예로의 전락, 여기에 스마트폰의 그늘이 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향유(享有)’와 ‘이용(利用)’의 개념은 목적과 수단의 개념으로 풀 수 있다. 한 대상을 향유, 즐겨 누린다는 것은 오직 그 자체를 위해서만 사랑한다는 말이다.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만 사랑하는 것이다. 반면에 어떤 대상을 이용한다는 것은 더 높은 차원의 목적을 위하여 잠시 수단으로 쓴다는 말이다.
당연히 향유의 대상은 지존하신 하나님이어야 하고, 이용의 대상은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것들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불행해지는 까닭은 이용해야 할 것을 향유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은 하나님이 아니기에 향유해서 안 되며, 여러 가지 선한 목적을 위하여 잠시 이용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인간의 본성이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우상제조 공장이라고 설파한 장 칼뱅의 말마따나 스마트폰은 어느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사실 스마트폰 그 자체는 좋은 것이다. 문제는 이 이기(利器)를 이용하는 우리의 자세에 있다.
마치 황금 그 자체는 좋은 것이로되 우리의 탐욕이 문제고, 음식은 좋지만 폭식이, 포도주는 선하지만 폭음이 문제가 되는 이치다.
더 정확히 말해서 스마트폰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닌 중립적인 것이다. 스마트폰의 선성(善性)은 전적으로 선한 목적으로 선용해야 할 사용자의 손에 달려 있다.
아무리 기계가 좋기로서니 하나님과 사람보다야 좋겠는가.
스마트폰이 애물단지가 되어 우리의 자유를 앗아가는 것은 더 좋은 선을 버리고 덜 좋은 선으로 굴러 떨어지는 사랑의 혼선과 도착에 있다.
영혼을 살찌우고 인간답게 만드는 선한 뉴스는 외면하고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쓰레기 정보에 탐닉하는 우리의 죄성이 잘못이다.
스마트폰을 통한 전 지구적 인간 소통과 연대, 그 허울 좋은 이면에는 하나님과의 불통과 인간소외라는 역기능이 도사리고 있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네.”(전 1:8)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과 메일 송수신은 기본이고, 동영상과 사진의 촬영 및 편집, 무엇보다도 자신이 원하는 각종 앱을 골라 설치하고 사용할 수 있다.
와이파이나 3G를 활용해 이동하면서도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 목적지도 찾고, 대중교통 시간도 확인하고, 책도 읽고, 메모도 하고, 금전거래도 한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전국의 부동산 정보를 손쉽게 조회할 수도 있게 됐다. 이토록 똑똑한 스마트폰의 국내 사용자가 이달 중순이면 30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앉으나 서나 스마트폰을 손에 달고 다니는 이들이 도처에 퍼져 있다.
스마트폰 알람소리로 잠을 깬 뒤 툭툭 치고 쓱쓱 문지르기 시작한 스마트폰을 밥을 먹으며, 길을 걸으며, 화장실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에도 하염없이 만지작거린다.
하물며 병실 침대에 누워서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환자도 있다. 사정이 이럴진대 이제 스마트폰보다 더 지독하게 떠받드는 우상도 없을 것이다.
청소년 10명 중 6명 이상은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감을 느낀다고 한다. 스마트폰 중독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갈 추세다.
스마트폰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못한다. 하지만 모든 기계문명이 그렇듯이 스마트폰에도 치명적인 부작용이 따른다.
어린이나 청소년의 경우 유해한 성인 사이트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잠시라도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초조해지는 스마트폰 금단현상도 나타난다.
가족간에 살가운 대화와 접촉이 끊어진 지도 오래다. 중독과 소통의 단절, 차가운 기계 노예로의 전락, 여기에 스마트폰의 그늘이 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향유(享有)’와 ‘이용(利用)’의 개념은 목적과 수단의 개념으로 풀 수 있다. 한 대상을 향유, 즐겨 누린다는 것은 오직 그 자체를 위해서만 사랑한다는 말이다.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만 사랑하는 것이다. 반면에 어떤 대상을 이용한다는 것은 더 높은 차원의 목적을 위하여 잠시 수단으로 쓴다는 말이다.
당연히 향유의 대상은 지존하신 하나님이어야 하고, 이용의 대상은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것들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불행해지는 까닭은 이용해야 할 것을 향유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은 하나님이 아니기에 향유해서 안 되며, 여러 가지 선한 목적을 위하여 잠시 이용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인간의 본성이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우상제조 공장이라고 설파한 장 칼뱅의 말마따나 스마트폰은 어느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사실 스마트폰 그 자체는 좋은 것이다. 문제는 이 이기(利器)를 이용하는 우리의 자세에 있다.
마치 황금 그 자체는 좋은 것이로되 우리의 탐욕이 문제고, 음식은 좋지만 폭식이, 포도주는 선하지만 폭음이 문제가 되는 이치다.
더 정확히 말해서 스마트폰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닌 중립적인 것이다. 스마트폰의 선성(善性)은 전적으로 선한 목적으로 선용해야 할 사용자의 손에 달려 있다.
아무리 기계가 좋기로서니 하나님과 사람보다야 좋겠는가.
스마트폰이 애물단지가 되어 우리의 자유를 앗아가는 것은 더 좋은 선을 버리고 덜 좋은 선으로 굴러 떨어지는 사랑의 혼선과 도착에 있다.
영혼을 살찌우고 인간답게 만드는 선한 뉴스는 외면하고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쓰레기 정보에 탐닉하는 우리의 죄성이 잘못이다.
스마트폰을 통한 전 지구적 인간 소통과 연대, 그 허울 좋은 이면에는 하나님과의 불통과 인간소외라는 역기능이 도사리고 있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네.”(전 1: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