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결혼은 언제 할래?(2012.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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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1 16:17 조회3,57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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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면 일가친척이 한 자리에 모여 웃음꽃을 피우는 추석이다.
하지만 노처녀, 노총각들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애인 있니?”와 “결혼은 언제 할래?”다.
그냥 싱글의 삶을 즐기는 이들도 있겠지만, 적당한 짝을 만나지 못했고 경제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에 홀로 사는 이들도 많다.
이런 처지도 몰라주고 어른들이 툭툭 던지는 말은 여간 괴로운 게 아니다.
그래서 친척들의 등쌀에 못 이겨 아예 귀향을 포기하고 엉뚱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싱글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결혼 안해?”라는 말 한 마디가 듣기 싫어 친척들이 다 떠난 뒤 몰래 집에 다녀가려는 이들도 있다.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노라면 집집마다 혼기를 놓친 자녀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과년한 딸이나 아들을 둔 권사님들은 언제나 걱정이 태산 같다. 어디 남의 집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내 누님들이 낳은 조카들 가운데에도 마흔을 바라보는 노총각이 몇 명이나 된다. 이런 현실을 볼 때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아예 결혼계획 없이 화려한 싱글을 꿈꾸며 즐기는 인상이다.
초대교회 시절엔 독신이 우월
실제로 2010년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여성 독신가구가 200만이 넘었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는 더 심각한데 20년 후면 물론 미혼뿐만 아니라 이혼과 사별을 포함해 독신가구 비율이 전체 가구의 40%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나홀로 생활이 출산과 육아 부담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만끽하고 자아실현을 하기에도 유리하다는 생각이 변하지 않는 한 독신 인구 수도 날이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성경은 독신을 어떻게 볼까. 교회사에서 한때 독신을 영적으로 우월한 생활로 여겼던 시대가 있다.
초대교회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성욕을 포기하고 독신으로 사는 이들을 자타가 영적인 엘리트로 공인했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교회는 다시 결혼과 가정생활을 적극 권장했다.
창세기는 분명히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결혼 제도가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질서로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신자가 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열등하거나 비정상적이라고 보는 것은 성서적 시각이 아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된 자”(마 19:12)가 있음을 밝히면서 독신에도 영적인
큰 의미를 부여하셨다. 바울 사도는 자기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와 사명이 있는 자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지만, 독신이 일반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선택은 아니라고 했다(고전 7:7-8).
중요한 것은 성경이 결혼만큼이나 독신도 좋은 선택임을 적극 긍정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독신으로 살되 그냥 세상적인 편리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라는 적극적 자유를 위한 것이라면 독신이야말로 하나님과 이웃을 더 잘 섬길 수 있는 선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독신은 단지 결혼하기 전의 과도기간이 아니라 결혼 못지않게 당당한 라이프스타일로서 환영할 수 있을 것이다.
독신도 당당한 라이프스타일
이제 결혼만이 크리스천들이 선택할 수 있는 규범적인 삶의 방식이라거나 아니면 독신보다 우월하다는 편견은 버리는 것이 좋다.
독신이 결혼보다 우월하지 않은 것처럼 결혼 역시 독신보다 우월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번 추석에도 우리 크리스천만큼은 나이 마흔 혹은 쉰을 훌쩍 넘긴 미혼 식구나 친척을 외모나 성격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독신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버린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더 잘 섬기기 위한 거룩한 선택이 되었으면 한다.
이번 추석에는 나도 장가 안 간 조카들에게 “결혼 언제 하니?” 따위는 묻지 않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노처녀, 노총각들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애인 있니?”와 “결혼은 언제 할래?”다.
그냥 싱글의 삶을 즐기는 이들도 있겠지만, 적당한 짝을 만나지 못했고 경제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에 홀로 사는 이들도 많다.
이런 처지도 몰라주고 어른들이 툭툭 던지는 말은 여간 괴로운 게 아니다.
그래서 친척들의 등쌀에 못 이겨 아예 귀향을 포기하고 엉뚱한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싱글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결혼 안해?”라는 말 한 마디가 듣기 싫어 친척들이 다 떠난 뒤 몰래 집에 다녀가려는 이들도 있다.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노라면 집집마다 혼기를 놓친 자녀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과년한 딸이나 아들을 둔 권사님들은 언제나 걱정이 태산 같다. 어디 남의 집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내 누님들이 낳은 조카들 가운데에도 마흔을 바라보는 노총각이 몇 명이나 된다. 이런 현실을 볼 때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아예 결혼계획 없이 화려한 싱글을 꿈꾸며 즐기는 인상이다.
초대교회 시절엔 독신이 우월
실제로 2010년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여성 독신가구가 200만이 넘었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는 더 심각한데 20년 후면 물론 미혼뿐만 아니라 이혼과 사별을 포함해 독신가구 비율이 전체 가구의 40%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나홀로 생활이 출산과 육아 부담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만끽하고 자아실현을 하기에도 유리하다는 생각이 변하지 않는 한 독신 인구 수도 날이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성경은 독신을 어떻게 볼까. 교회사에서 한때 독신을 영적으로 우월한 생활로 여겼던 시대가 있다.
초대교회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성욕을 포기하고 독신으로 사는 이들을 자타가 영적인 엘리트로 공인했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교회는 다시 결혼과 가정생활을 적극 권장했다.
창세기는 분명히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결혼 제도가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질서로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신자가 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열등하거나 비정상적이라고 보는 것은 성서적 시각이 아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된 자”(마 19:12)가 있음을 밝히면서 독신에도 영적인
큰 의미를 부여하셨다. 바울 사도는 자기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와 사명이 있는 자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지만, 독신이 일반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선택은 아니라고 했다(고전 7:7-8).
중요한 것은 성경이 결혼만큼이나 독신도 좋은 선택임을 적극 긍정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독신으로 살되 그냥 세상적인 편리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라는 적극적 자유를 위한 것이라면 독신이야말로 하나님과 이웃을 더 잘 섬길 수 있는 선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독신은 단지 결혼하기 전의 과도기간이 아니라 결혼 못지않게 당당한 라이프스타일로서 환영할 수 있을 것이다.
독신도 당당한 라이프스타일
이제 결혼만이 크리스천들이 선택할 수 있는 규범적인 삶의 방식이라거나 아니면 독신보다 우월하다는 편견은 버리는 것이 좋다.
독신이 결혼보다 우월하지 않은 것처럼 결혼 역시 독신보다 우월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번 추석에도 우리 크리스천만큼은 나이 마흔 혹은 쉰을 훌쩍 넘긴 미혼 식구나 친척을 외모나 성격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독신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버린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더 잘 섬기기 위한 거룩한 선택이 되었으면 한다.
이번 추석에는 나도 장가 안 간 조카들에게 “결혼 언제 하니?” 따위는 묻지 않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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