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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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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1 14:25 조회3,4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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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에라스무스 평전-종교의 광기에 맞서 싸운 인문주의자'를 읽은 것은 내게 벼락 같은 행운이었다. 김열규의 '독서'를 탐독하다가 우연히 낚아올린 대어였다.

에라스무스(1466?∼1536)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 스타 중의 스타였다. '최상과 최대'(optimum et maximum)라는 말에 꼭 걸맞게 '만물박사' '학문의 군주' '견줄 데 없는 인간이자 불멸의 박사'였다.

신학자, 성서번역가, 고대언어학자, 작가로서 각계각층의 존경과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그는 인문주의(humanism)의 이상이 국가와 인종과 민족을 초월해 유럽을 통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최초의 의식 있는 세계주의자'였던 것이다.



 '에라스무스적인 것'은 다양한 측면이 있지만 공평무사한 정신을 제일로 친다. 패를 짜지 않고 한쪽 편을 들지 않으려는 중립 정신이다. 평화애호가 에라스무스가 미워한 단 하나의 적은 흔히 증오나 폭력과

연계되기 쉬운 광기와 광신이다. 독단과 편협으로 똘똘 뭉친 광신이야말로 어리석음의 대명사이기에 그는 타협을 거부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전쟁으로까지 내모는 광신에 맞서 자유와 관용과 화해와

조화를 추구한다.



 종교개혁이 본격화되면서 시대는 그에게 편들기를 강요한다. 왼편 오른편, 교황파 루터파, 이 패거리 저 패거리에 가담하기를 요구한다. 타고난 싸움꾼 루터는 때로 자기편을 들지 않고 모호하고

겁쟁이처럼 보이는 에라스무스를 '지난 1000년 동안 존재한 적이 없었던 그리스도 최대의 적'이라고까지 매도한다. 이렇게 에라스무스가 균형을 잃지 않고 중재자의 일을 자처하다 보니

양쪽 모두의 협공을 받아 두 배로 핍박을 당한다. 하지만 그 어떤 회유와 협박도 그를 흔들지 못한다. "난 결코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끝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으로 남는다.



  에라스무스는 정신과 이념에서는 승리했으나 현실에서는 패배했다. 결단과 추진력이 부족했고 그의 정신이 민중의 삶에까지 구체적으로 파고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빠지기 쉬운 독선과 편견, 광신과 증오, 폭력과 전쟁에 맞서 화합과 조정을 구했다는 점에서는 승자였다.



 오늘도 파당심과 광신은 증오와 폭력과 맞물려 그리스도적인 일치와 평화를 위협한다. 광기의 시대일수록 이성과 도덕과 자유의 힘에 희망을 건 에라스무스적인 것이 더욱 더 절실하다.



 "나는 에라스무스가 그 편에 가담했는지 알아보려 했다. 그러나 어떤 상인이 내게 대답했다. '에라스무스는 늘 자기 자신만을 대표하죠'(Erasmus est homo pro se)." "편을 들지 말자. 편을 짜지 말자.

다른 편의 말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더 나쁘게는 내 편의 말은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김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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