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정의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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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0 21:35 조회3,31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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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산상수훈을 통하여 가르치신 아가페 윤리는 지키기 어렵다. 너무나 완전하고 비타협적이기에 죄인인 인간이 복잡한 세상에서 실천하기가 힘들다. '불가능한 가능성'이라는 말이 꼭 맞다.
라인홀드 니버의 명저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1932)는 감상적인 사랑지상주의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개인은 무조건적인 자기희생과 비폭력 무저항을 아주 드물게 실천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적인 이기심이 난마처럼 뒤얽힌 사회적 제도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인간사회의 무지는 교육으로, 이기주의는 기독교의 이타적 사랑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도덕적 낙관주의는 결코
집단 이기주의의 집요함을 알지 못한다.
니버는 사랑 중심의 낭만적 낙관주의를 버리고 정의 중심의 정치적 현실주의를 표방한다. 집단 권력들 사이의 이기심이 상충할 때 양심이나 이성, 사랑만으로는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이른바 권력정치(power politics)의 출현이 불가피하여 때로 강제력과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힘의 견제와 균형을 이룰 때 사회정의는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니버가 사랑을 완전히 포기한 것
은 아니다. 사랑을 궁극적 목표 혹은 규범적 원리로서 종말론적인 미래에다가 설정해놓고서는 그 사랑에로의 현실적인 근접 방식으로서의 정의를 추구한다.
오늘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총선일이다. 불과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하루살이 정당사에 자괴감이 든다.
그러나 정작 이번 총선에서 가장 우려할 만한 징후는 기독계가 이단시하는 정파의 국회 진출 움직임이다.
이에 대한 정치적 대안으로서 기독당이 출현했다고 하지만 초교파적인 합의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초기 주도세력들이 이 나라 기독교를 대표할 만한 분들인가에 대한 회의가 없지 않았
다. 그럼에도 이단 종파의 국회입성 저지에 내남 없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제 우리는 정교분리의 고루한 원칙만 고수한 채 수수방관할 때가 아니다. 성서적 사랑의 원리와 난장판 정치 현실 사이의 긴장을 슬기롭게 해소할 기독정치인들이 필요하다.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를 어떻게 집단 이기심이 판치는 정치 현실에다가 정의롭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정책 마련에 심층적이고 광범위한 토론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그 당명에서부터 너무도 나이브한 '기독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지난하고 타협에 타협을 거듭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냉철한 현실 인식이 절실하다.
선거는 종이 돌멩이(paper stone)를 후보자와 정당을 향해서 던지는 것이다. 종이로 된 짱돌을 맞아야 할 사람들과 정당들을 슬기롭게 가려야 할 시간이 왔다.
라인홀드 니버의 명저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1932)는 감상적인 사랑지상주의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개인은 무조건적인 자기희생과 비폭력 무저항을 아주 드물게 실천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적인 이기심이 난마처럼 뒤얽힌 사회적 제도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인간사회의 무지는 교육으로, 이기주의는 기독교의 이타적 사랑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도덕적 낙관주의는 결코
집단 이기주의의 집요함을 알지 못한다.
니버는 사랑 중심의 낭만적 낙관주의를 버리고 정의 중심의 정치적 현실주의를 표방한다. 집단 권력들 사이의 이기심이 상충할 때 양심이나 이성, 사랑만으로는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이른바 권력정치(power politics)의 출현이 불가피하여 때로 강제력과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힘의 견제와 균형을 이룰 때 사회정의는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니버가 사랑을 완전히 포기한 것
은 아니다. 사랑을 궁극적 목표 혹은 규범적 원리로서 종말론적인 미래에다가 설정해놓고서는 그 사랑에로의 현실적인 근접 방식으로서의 정의를 추구한다.
오늘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총선일이다. 불과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하루살이 정당사에 자괴감이 든다.
그러나 정작 이번 총선에서 가장 우려할 만한 징후는 기독계가 이단시하는 정파의 국회 진출 움직임이다.
이에 대한 정치적 대안으로서 기독당이 출현했다고 하지만 초교파적인 합의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초기 주도세력들이 이 나라 기독교를 대표할 만한 분들인가에 대한 회의가 없지 않았
다. 그럼에도 이단 종파의 국회입성 저지에 내남 없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제 우리는 정교분리의 고루한 원칙만 고수한 채 수수방관할 때가 아니다. 성서적 사랑의 원리와 난장판 정치 현실 사이의 긴장을 슬기롭게 해소할 기독정치인들이 필요하다.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를 어떻게 집단 이기심이 판치는 정치 현실에다가 정의롭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정책 마련에 심층적이고 광범위한 토론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그 당명에서부터 너무도 나이브한 '기독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지난하고 타협에 타협을 거듭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냉철한 현실 인식이 절실하다.
선거는 종이 돌멩이(paper stone)를 후보자와 정당을 향해서 던지는 것이다. 종이로 된 짱돌을 맞아야 할 사람들과 정당들을 슬기롭게 가려야 할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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