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향수와 살충제(201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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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1 16:29 조회3,44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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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으로 나서는 일이 점점 더 두려운 시대가 되고 있다.
그만큼 사회가 선진화됐다는 표시이기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인간관계는 더 살벌해지는 것 같다.
일전에 우리나라 법조인으로서 손꼽힐 정도로 존경받던 분이 국무총리로 지명됐다가 일대 수난을 당한 적이 있다.
청문회에 제대로 서보기도 전에 도중하차한 뒤 언론의 무차별 검증이 자신을 마치 범죄인 다루는 듯해서 가족들까지 충격에 졸도하고 가정파탄 직전까지 내몰렸다고 술회했다.
국가 지도자에게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위선”이 연상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타인에게는 지독히 매서운 잣대를 들이대되 정작 자신의 과오에는 관대한 세태야말로 이중적이다.
내 눈 속 들보를 먼저 봐야
요즘 가뜩이나 위축된 교계를 마구 흔들어대는 이슈는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논문표절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표절 혐의를 받는 것은 사실인 듯싶다.
하지만 15년 전 제출해서 이미 통과된 논문을 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 끄집어낸 걸까.
공교롭게도 이 교회는 강남에 엄청난 규모의 건축을 하고 있기에 혹시 교회건축을 반대하는 이들이 털어서 먼지 나게 할 요량으로 터뜨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의 도덕기준으로 볼 때 표절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빌미로 큰 건축을 하고 있는 목사에게 사임하라고 압박하는 것이 과연 최선책일지는 의문이 든다.
예수님은 3년이라는 충분한 시간과 여건이 주어졌지만 열매를 못 맺는 무화과나무를 두둔하셨다(눅 13:6∼9).
관상용이 아닌 과실용으로 심은 나무이기에 열매 없는 나무는 무조건 도끼로 찍어내야 한다.
하지만 과원지기는 주인에게 또 1년을 유예해 달라고 부탁한 뒤 거름을 주어서라도 그 못난 나무가 기어코 열매를 맺게 하겠노라고 매달린다.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도끼’로 상징되는 공의와 심판보다 ‘거름’으로 상징되는 용서와 사랑이 훨씬 더 큰 분이다.
정의를 구현하겠노라고 날선 도끼를 휘두르기보다 더럽고 냄새나는 거름 주는 사랑, 여기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무작정 기다리는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이 있다.
헬무트 틸리케의 자서전에 나오는 대목이다.
초등학교 시절 한스라는 친구는 늘 공부를 안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수업시간에 질문이 나오면 막힘없이 대답하는 영재였다.
하지만 한스는 자기보다 뒤처진 친구들을 깔보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틸리케를 비롯한 급우들이 이 교만하고 가식에 찬 공부벌레를 골탕 먹이려고 음모를 꾸몄고, 어느 날 아침 친구들과 함께 교문 뒤에 숨어서 한스가 등교하기만을 기다렸다.
다른 사람의 아픔 보듬자
그날따라 한스는 지역에서 존경받는 교육감 아버지와 나란히 학교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몇 번이고 어린 아들의 뺨을 어루만지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다. 학교로 들어서는 아들과 헤어지기 아쉬운지 아버지는 또 여러 번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이 광경을 몰래 훔쳐보던 틸리케와 친구들의 마음은 맥없이 무너졌다. 저토록 사랑받는 아이를 어떻게 우리가 해코지할 수 있단 말인가!
필립 얀시는 은혜 없는 이 세상이 살충용 분무기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탄식한다.
혹 우리는 주변이 죄악으로 만연해 있다는 생각으로 “너 죽어라!” 도덕적 살충제를 함부로 뿌리는 율법주의자는 아닌지 모르겠다.
살충제는 그저 생물을 죽일 뿐 야멸차고 여전히 공허하나, 골백번 용서하고 기다리는 사랑의 향수는 몇 방울만 뿌려도 이 세상을 좀 더 훈훈하고 향기롭게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그만큼 사회가 선진화됐다는 표시이기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인간관계는 더 살벌해지는 것 같다.
일전에 우리나라 법조인으로서 손꼽힐 정도로 존경받던 분이 국무총리로 지명됐다가 일대 수난을 당한 적이 있다.
청문회에 제대로 서보기도 전에 도중하차한 뒤 언론의 무차별 검증이 자신을 마치 범죄인 다루는 듯해서 가족들까지 충격에 졸도하고 가정파탄 직전까지 내몰렸다고 술회했다.
국가 지도자에게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위선”이 연상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타인에게는 지독히 매서운 잣대를 들이대되 정작 자신의 과오에는 관대한 세태야말로 이중적이다.
내 눈 속 들보를 먼저 봐야
요즘 가뜩이나 위축된 교계를 마구 흔들어대는 이슈는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논문표절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표절 혐의를 받는 것은 사실인 듯싶다.
하지만 15년 전 제출해서 이미 통과된 논문을 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 끄집어낸 걸까.
공교롭게도 이 교회는 강남에 엄청난 규모의 건축을 하고 있기에 혹시 교회건축을 반대하는 이들이 털어서 먼지 나게 할 요량으로 터뜨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의 도덕기준으로 볼 때 표절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빌미로 큰 건축을 하고 있는 목사에게 사임하라고 압박하는 것이 과연 최선책일지는 의문이 든다.
예수님은 3년이라는 충분한 시간과 여건이 주어졌지만 열매를 못 맺는 무화과나무를 두둔하셨다(눅 13:6∼9).
관상용이 아닌 과실용으로 심은 나무이기에 열매 없는 나무는 무조건 도끼로 찍어내야 한다.
하지만 과원지기는 주인에게 또 1년을 유예해 달라고 부탁한 뒤 거름을 주어서라도 그 못난 나무가 기어코 열매를 맺게 하겠노라고 매달린다.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도끼’로 상징되는 공의와 심판보다 ‘거름’으로 상징되는 용서와 사랑이 훨씬 더 큰 분이다.
정의를 구현하겠노라고 날선 도끼를 휘두르기보다 더럽고 냄새나는 거름 주는 사랑, 여기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무작정 기다리는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이 있다.
헬무트 틸리케의 자서전에 나오는 대목이다.
초등학교 시절 한스라는 친구는 늘 공부를 안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수업시간에 질문이 나오면 막힘없이 대답하는 영재였다.
하지만 한스는 자기보다 뒤처진 친구들을 깔보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틸리케를 비롯한 급우들이 이 교만하고 가식에 찬 공부벌레를 골탕 먹이려고 음모를 꾸몄고, 어느 날 아침 친구들과 함께 교문 뒤에 숨어서 한스가 등교하기만을 기다렸다.
다른 사람의 아픔 보듬자
그날따라 한스는 지역에서 존경받는 교육감 아버지와 나란히 학교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몇 번이고 어린 아들의 뺨을 어루만지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다. 학교로 들어서는 아들과 헤어지기 아쉬운지 아버지는 또 여러 번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이 광경을 몰래 훔쳐보던 틸리케와 친구들의 마음은 맥없이 무너졌다. 저토록 사랑받는 아이를 어떻게 우리가 해코지할 수 있단 말인가!
필립 얀시는 은혜 없는 이 세상이 살충용 분무기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탄식한다.
혹 우리는 주변이 죄악으로 만연해 있다는 생각으로 “너 죽어라!” 도덕적 살충제를 함부로 뿌리는 율법주의자는 아닌지 모르겠다.
살충제는 그저 생물을 죽일 뿐 야멸차고 여전히 공허하나, 골백번 용서하고 기다리는 사랑의 향수는 몇 방울만 뿌려도 이 세상을 좀 더 훈훈하고 향기롭게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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