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미주 한인선교 회고와 전망(2013.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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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1 16:34 조회3,59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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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 4월 10∼14일 호놀룰루에서 열린 하와이 이민선교 11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했다.
이 역사적 행사가 필자가 섬기는 내리교회의 자매인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에서 개최되었기에 더욱더 감격스러웠다.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일할 이민 노무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데쉴러(David Deshler·大是羅)가 제물포에 동서개발회사를 세우고 구인광고를 냈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아직 유교적 관습에 얽매여 있던 이들이 미지의 나라로 이민을 떠난다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데쉴러는 자신의 사무소 바로 옆에 있던 내리교회의 미국인 선교사 존스(George Jones·趙元時)에게 부탁했다.
존스가 주로 교인들을 설득해 최종적으로 102명의 공식이민 제1진이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 이민선교 110주년
존스는 통역 겸 인솔자로 안정수 권사 등을 파견해서 갤릭호 선상에서부터 예배를 드리게 했다.
떠날 때 50여명이었던 교인의 숫자가 선상예배를 통해 8명이 더 늘어나 58명이 되었는데, 이들이 중심이 되어 1903년 11월 10일 미주 최초 한인교회인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가 탄생했다.
이에 고무된 존스는 내리교회 홍승하 전도사를 그 이듬해 2월 호놀룰루에 파송해 이 교회를 돌보게 했다. 홍 전도사는 아마도 한국교회가 해외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스도교회는 이 사실을 잊지 않고자 오롯하고 아담한 예배당 하나를 성별해 내리채플로 명명했다.
내리채플에 들어서자 친정교회에서 왔다며 반가이 맞아주는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들의 모습이 눈물겹도록 정겨웠다.
필자는 꼭 10년 전 미주 한인선교 100주년 기념대회가 역시 호놀룰루에서 열렸을 때 기조강연을 통해 재미 교포들의 현주소를 짚어 본 적이 있었다.
물론 이민이 시작된 것은 1903년부터이지만 대규모의 보통 사람들에게 이민문호가 본격적으로 개방된 것은 1970년대 이후라는 사실부터 지적했다.
미주 한인 동포의 90% 이상이 70년대 이후에 이주해 간 이민자들이라고 할 때, 주류 이민사는 겨우 한 세대를 넘어선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개척-생존’의 단계와 ‘정착-안정’의 단계, 그리고 ‘동화-변혁’의 단계로 이루어지는 이민생활의 3단계 중에서 교민 1세대 혹은 1.5세대는 평균적으로 말해서 아직 1단계에 정체되어 있거나
1단계와 2단계의 접점에 도달해 있는 것으로 진단했었다.
이번 110주년 대회에 참석하면서도 이와 같은 진단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신념을 굳혔다.
전문 지식인들이나 발군의 능력을 가진 실업인들의 경우, 주류사회에 완전히 동화된 뒤 한국계로서 미국사회의 변혁에 적극 공헌하는 최상의 단계에 도달한 인사들의 수가 적지 않다.
하지만 대다수의 평균 이민자들은 아직도 앤더슨이 언급한 ‘원격적 민족주의(remote nationalism)’에 빠져 몸만 미국에 살지 여전히 한국 신문을 보고 한국 드라마를 보는 등, 모국적 관습과 관심에 굳게 얽매
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미 문화 창조적 융합해야
이제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 흩어져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에게 중요한 것은 여전히 한국적인 것만 붙들려는 ‘본국 환원성’과 이민 간 그 나라에 완전히 흡수 통합되려는 ‘이국 귀속성’의 양극을 넘어서는 길이다.
바벨론 포로 이민자들의 후예였던 다니엘이나 느헤미야가 보여준 자세야말로 이와 같은 이상적 이민자상의 전형이라고 할 것이다. 완벽하게 이국 언어와 문화에 순응하면서도 민족적 정체성과 모국에 대한 기
억을 저버리지 않고 양문화를 창조적으로 융합할 수 있는 한국계 이민자들을 길러내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재미 동포들은 110년 전 조국을 떠나 기독교 신앙 하나를 붙들고 미국에 들어온 선조들의 뿌리를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김기림의 ‘바다와 나비’).
이 역사적 행사가 필자가 섬기는 내리교회의 자매인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에서 개최되었기에 더욱더 감격스러웠다.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일할 이민 노무자들을 모집하기 위해 데쉴러(David Deshler·大是羅)가 제물포에 동서개발회사를 세우고 구인광고를 냈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아직 유교적 관습에 얽매여 있던 이들이 미지의 나라로 이민을 떠난다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데쉴러는 자신의 사무소 바로 옆에 있던 내리교회의 미국인 선교사 존스(George Jones·趙元時)에게 부탁했다.
존스가 주로 교인들을 설득해 최종적으로 102명의 공식이민 제1진이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 이민선교 110주년
존스는 통역 겸 인솔자로 안정수 권사 등을 파견해서 갤릭호 선상에서부터 예배를 드리게 했다.
떠날 때 50여명이었던 교인의 숫자가 선상예배를 통해 8명이 더 늘어나 58명이 되었는데, 이들이 중심이 되어 1903년 11월 10일 미주 최초 한인교회인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가 탄생했다.
이에 고무된 존스는 내리교회 홍승하 전도사를 그 이듬해 2월 호놀룰루에 파송해 이 교회를 돌보게 했다. 홍 전도사는 아마도 한국교회가 해외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스도교회는 이 사실을 잊지 않고자 오롯하고 아담한 예배당 하나를 성별해 내리채플로 명명했다.
내리채플에 들어서자 친정교회에서 왔다며 반가이 맞아주는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들의 모습이 눈물겹도록 정겨웠다.
필자는 꼭 10년 전 미주 한인선교 100주년 기념대회가 역시 호놀룰루에서 열렸을 때 기조강연을 통해 재미 교포들의 현주소를 짚어 본 적이 있었다.
물론 이민이 시작된 것은 1903년부터이지만 대규모의 보통 사람들에게 이민문호가 본격적으로 개방된 것은 1970년대 이후라는 사실부터 지적했다.
미주 한인 동포의 90% 이상이 70년대 이후에 이주해 간 이민자들이라고 할 때, 주류 이민사는 겨우 한 세대를 넘어선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개척-생존’의 단계와 ‘정착-안정’의 단계, 그리고 ‘동화-변혁’의 단계로 이루어지는 이민생활의 3단계 중에서 교민 1세대 혹은 1.5세대는 평균적으로 말해서 아직 1단계에 정체되어 있거나
1단계와 2단계의 접점에 도달해 있는 것으로 진단했었다.
이번 110주년 대회에 참석하면서도 이와 같은 진단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신념을 굳혔다.
전문 지식인들이나 발군의 능력을 가진 실업인들의 경우, 주류사회에 완전히 동화된 뒤 한국계로서 미국사회의 변혁에 적극 공헌하는 최상의 단계에 도달한 인사들의 수가 적지 않다.
하지만 대다수의 평균 이민자들은 아직도 앤더슨이 언급한 ‘원격적 민족주의(remote nationalism)’에 빠져 몸만 미국에 살지 여전히 한국 신문을 보고 한국 드라마를 보는 등, 모국적 관습과 관심에 굳게 얽매
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미 문화 창조적 융합해야
이제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 흩어져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에게 중요한 것은 여전히 한국적인 것만 붙들려는 ‘본국 환원성’과 이민 간 그 나라에 완전히 흡수 통합되려는 ‘이국 귀속성’의 양극을 넘어서는 길이다.
바벨론 포로 이민자들의 후예였던 다니엘이나 느헤미야가 보여준 자세야말로 이와 같은 이상적 이민자상의 전형이라고 할 것이다. 완벽하게 이국 언어와 문화에 순응하면서도 민족적 정체성과 모국에 대한 기
억을 저버리지 않고 양문화를 창조적으로 융합할 수 있는 한국계 이민자들을 길러내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재미 동포들은 110년 전 조국을 떠나 기독교 신앙 하나를 붙들고 미국에 들어온 선조들의 뿌리를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김기림의 ‘바다와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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