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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시론- 진정한 숭례(崇禮)의 복원 (20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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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1 16:35 조회3,0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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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이 복원됐다. 글자 그대로 예(禮)를 높이는 문이다. 실제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5덕을 높이기 위해 5방에 대문을 세웠다고 한다.

숭례문의 복구로 예의도 함께 복구됐으면 좋겠다. 동방예의지국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나라에는 지금 비례(非禮)와 무례(無禮)가 판을 치고 있다.

요 며칠 사이 한 기업체의 영업사원이 대리점주에게 마구 욕설을 퍼붓는 음성 파일이 공개돼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녹취록을 들어보면 쩔쩔매며 욕을 듣는 사람보다 폭언을 퍼붓는 남성이 훨씬 더 젊어 보인다. 연장자에 대한 예절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에서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수모가 아닐 수 없다.



노인공경 예절마저 흔들려



 사실 이런 결례는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몸이 무거운 임산부나 거동이 불편한 노약자가 있어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젊은이들을 버스나 전철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나이 어린 낯선 사람을 만날 때면 도리어 봉변이라도 당할까봐 말 한번 붙이기가 어렵고, 설령 코앞에서 못된 짓을 저질러도 훈계 한마디 던지기 어려운 세태다.

떼를 지어 길거리를 지나가는 어린이, 청소년 할 것 없이 입에서는 쉴 새 없이 거친 욕설과 은어들이 쏟아져 나온다. 교회 안에서조차 점차 예의가 실종되고 있는 판이니 세상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인이 된 다음에도 유교적 위계질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수직적이고 배타적인 유교문화에 젖어 수평적이고 포용적인 기독교 문화에 잘 동화되지 못한다.

그러기에 무늬만 기독교지 우리 안에는 여전히 남존여비, 장유유서 등의 유교적 가치관이 짙게 깔려 있다.

일례로 목사 사회에서 나이와 연급을 심하게 따지고 연급순으로 총회대표를 정하는 것 등은 결코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같이 유교적 예법에 무의식적 지배를 받아온 교회이지만 요즈음은 이마저도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가치관의 착종(錯綜)이라고 할까, 이기와 편리에 따라 이런 전통적 예절마저 흔들리고 있다.

그동안 미풍으로 여겨온 노인 공경이나 선배 우대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다.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이 버나드 쇼를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만일 제가 당신과 결혼을 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아이가 태어날 것입니다.

그 아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용가의 육체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극작가의 두뇌를 갖고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쇼의 대꾸는 차가웠다.

 “천만에요. 세상에서 가장 못 생긴 내 육체에 당신의 텅 빈 머리를 닮은 기형아가 태어나겠지요.”

예를 강조하는 전통문화의 뿌리 위에 평등과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서구기독교 가치를 접목시키면 분명히 찬란한 융합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겠지만, 잘못 조합될 경우 경직된 뿌리에 얄팍한 가지를 친 사이

비 문화가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풍자다.



국가간 예의도 되찾는 계기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기본적 예의가 사라진 사회는 짐승처럼 되고 만다. 갈수록 군국주의 망령에 사로잡혀 망언과 망동을 일삼는 일본의 아베 신조 극우정권 역시 국가 간의 예의를 잃고 있다.

상호존중이라는 예를 잊을 경우 국가 간에도 폭언과 폭력을 불사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작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보여주듯 홀로코스트는 “인간이라면 이렇게까지는 할 리가 없다”는

일체의 환상을 산산이 깨버린 역사적 비극이다. 히틀러의 개인적 분노와 욕구불만이 독일의 국가적 자존심과 맞물렸을 때 유대인에 대한 극한의 무례로 치달렸다. 작은 무례가 반복되자 점차 수치심을 잃고

광기 어린 야수로 변해갔던 것이다. 아우슈비츠와 일제의 군국주의는 현재진행형이다. 숭례문의 복원으로 좁게는 개인 간에, 넓게는 국가 간에 무너져가는 예도 함께 복원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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