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빅토르 안 신드롬’ 그 이후(201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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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11-21 16:42 조회3,43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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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두바이에 다녀왔다. 온통 사막지대 위에 최고의 빌딩들을 지어놓은 것도 놀라웠지만, UAE 전체 인구의 약 89%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두바이의 현지인은 겨우 9%에 불과하다는 말도 들었다. 이런 추세로 외국인 체류자의 수가 증가할 경우 2025년에는 내국인 비율이 1% 미만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거리에 나다닌다고 해서 다 그 나라 시민들은 아니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십중팔구 외국인들이 활개를 치고 다녀도 사회 전반에 전혀 불안기가 보이지 않았고 다민족들끼리 잘 지내고 있었다.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선수는 빅토르 안이었다.
2011년 러시아로 귀화한 안 선수가 쇼트트랙에서 연거푸 메달을 따내자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내남없이 한국 선수보다 빅토르를 더 응원했다.
옛날이었더라면 매국노로 지탄 받았겠지만 이번만큼은 국민의 대다수가 국적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그의 딱한 처지를 십분 이해해 준 것 같았다.
빅토르 안에 열광하면 열광할수록 한국 빙상연맹은 십자포화에 휩싸였다. 이제라도 외양간을 단단히 고쳐서 또 다른 소들을 잃어서 안 된다고 언성을 높였다.
국적변경은 개인의 선택권
냉정히 생각하면 안 선수는 부상으로 인해 국가대표로 선발될 수 없게 되자 올림픽에 더 출전하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자 국적을 바꿨을 뿐이다.
하지만 국민 상당수는 안 선수가 부당한 핍박을 받아 토사구팽을 당했기 때문에 러시아로 이적할 수밖에 없었다고 두둔했다.
이와 같이 적어도 국적변경과 관련된 ‘빅토르 안 신드롬’에는 두 가지 뚜렷한 흐름이 감지된다.
먼저 개인의 자아성취를 위해서 국적도 바꿀 수 있다는 개인주의적 경향이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팽배해진 것 같다.
개인의 비전보다 국가집단의 목표를 강하게 앞세워 왔던 이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국적은 따지지 않고 빅토르를 열광적으로 응원했던 사람들은 개인보다 국가의 이익을 앞세워야 한다는 기존의 대전제를 망각했다.
국적 변경을 조국에 대한 배신이 아닌, 한 개인의 자유선택으로 존중해주는 아량이 생겼다는 말이다.
또한 날이 갈수록 국수주의나 민족주의가 엷어지는 느낌이다. 이것은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 수의 증가와 무관치 않다.
지난해 국내 거주 외국인 수는 157만명 이상으로, 인구 100명 중 3명 정도가 외국인이라는 통계가 있다. 우리와 피부와 언어가 다른 외국인은 이제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길거리나 이웃집에서 일상적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다문화 시대에 ‘우리 민족끼리’라는 순혈주의적 발상은 건강치 못하다.
우리가 히틀러의 나치 정권과 일본의 우경화 행보에 분개하는 이유도 저들의 배타적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겠는가.
민족주의 벽 허문 예수 닮길
기실 국적을 바꾼 해외동포들 중에는 본국에 사는 우리보다 훨씬 더 한국적이고 애국적인 이들이 즐비하다. 앤더슨이 말한 ‘원격적 민족주의’,
즉 몸만 외국에 있지 모국에 대한 기억이나 풍속, 언어, 도덕철학, 식생활 습관, 정치 신조 등등을 외국에서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는 동포들도 부지기수로 많다.
어쩌면 빅토르도 국적만 바꿨을 뿐 그 속내는 여전히 뼛속 깊이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
예수님은 수시로 국경을 넘나들면서 외국인들의 병을 고쳐 주셨고 편협한 민족주의의 벽을 허무셨다. 진정한 인간화를 위해 우리는 특히 종교적 광신과 민족주의적 광기의 결합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민족과 종교를 넘어서 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이교도가 따로 없으며 오직 인간만이 있다. 인간을 인간과 하나님의 자녀로 대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유일한 예배다.”(라가츠)
두바이의 현지인은 겨우 9%에 불과하다는 말도 들었다. 이런 추세로 외국인 체류자의 수가 증가할 경우 2025년에는 내국인 비율이 1% 미만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거리에 나다닌다고 해서 다 그 나라 시민들은 아니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십중팔구 외국인들이 활개를 치고 다녀도 사회 전반에 전혀 불안기가 보이지 않았고 다민족들끼리 잘 지내고 있었다.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선수는 빅토르 안이었다.
2011년 러시아로 귀화한 안 선수가 쇼트트랙에서 연거푸 메달을 따내자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내남없이 한국 선수보다 빅토르를 더 응원했다.
옛날이었더라면 매국노로 지탄 받았겠지만 이번만큼은 국민의 대다수가 국적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그의 딱한 처지를 십분 이해해 준 것 같았다.
빅토르 안에 열광하면 열광할수록 한국 빙상연맹은 십자포화에 휩싸였다. 이제라도 외양간을 단단히 고쳐서 또 다른 소들을 잃어서 안 된다고 언성을 높였다.
국적변경은 개인의 선택권
냉정히 생각하면 안 선수는 부상으로 인해 국가대표로 선발될 수 없게 되자 올림픽에 더 출전하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자 국적을 바꿨을 뿐이다.
하지만 국민 상당수는 안 선수가 부당한 핍박을 받아 토사구팽을 당했기 때문에 러시아로 이적할 수밖에 없었다고 두둔했다.
이와 같이 적어도 국적변경과 관련된 ‘빅토르 안 신드롬’에는 두 가지 뚜렷한 흐름이 감지된다.
먼저 개인의 자아성취를 위해서 국적도 바꿀 수 있다는 개인주의적 경향이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팽배해진 것 같다.
개인의 비전보다 국가집단의 목표를 강하게 앞세워 왔던 이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국적은 따지지 않고 빅토르를 열광적으로 응원했던 사람들은 개인보다 국가의 이익을 앞세워야 한다는 기존의 대전제를 망각했다.
국적 변경을 조국에 대한 배신이 아닌, 한 개인의 자유선택으로 존중해주는 아량이 생겼다는 말이다.
또한 날이 갈수록 국수주의나 민족주의가 엷어지는 느낌이다. 이것은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 수의 증가와 무관치 않다.
지난해 국내 거주 외국인 수는 157만명 이상으로, 인구 100명 중 3명 정도가 외국인이라는 통계가 있다. 우리와 피부와 언어가 다른 외국인은 이제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길거리나 이웃집에서 일상적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다문화 시대에 ‘우리 민족끼리’라는 순혈주의적 발상은 건강치 못하다.
우리가 히틀러의 나치 정권과 일본의 우경화 행보에 분개하는 이유도 저들의 배타적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겠는가.
민족주의 벽 허문 예수 닮길
기실 국적을 바꾼 해외동포들 중에는 본국에 사는 우리보다 훨씬 더 한국적이고 애국적인 이들이 즐비하다. 앤더슨이 말한 ‘원격적 민족주의’,
즉 몸만 외국에 있지 모국에 대한 기억이나 풍속, 언어, 도덕철학, 식생활 습관, 정치 신조 등등을 외국에서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는 동포들도 부지기수로 많다.
어쩌면 빅토르도 국적만 바꿨을 뿐 그 속내는 여전히 뼛속 깊이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
예수님은 수시로 국경을 넘나들면서 외국인들의 병을 고쳐 주셨고 편협한 민족주의의 벽을 허무셨다. 진정한 인간화를 위해 우리는 특히 종교적 광신과 민족주의적 광기의 결합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민족과 종교를 넘어서 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이교도가 따로 없으며 오직 인간만이 있다. 인간을 인간과 하나님의 자녀로 대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유일한 예배다.”(라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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