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인천 최초의 서구식 자립예배당을 복원한 “제물포웨슬리 예배당” 한국 선교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의 건축이 1900년 6월24일 시작되었다. 늘어나는 성도를 우각동의 애즈베리 예배당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내부 미장과 스토브도 없는 유난히도 추운 겨울에 차가운 냉기가 도는 예배당으로 입당하여 1902년 12월 24일 성탄예배를 봉헌예배로 드렸다.
안타까운 것은 웨슬리 예배당에 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존스 목사님의 매일 매일의 기록(journal)과 선교보고서에서 건축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단서를 근자에 발견할 수 있었다. 웨슬리 예배당의 사진과 기록물들을 통하여 건물의 면면을 살펴 건축도면을 완성하였다.
"우리는 부활절날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창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나라 백성들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1882년 5월22일 한미간에 맺어진 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인의 입국과 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결과 1885년 4월 5일 한국에 주재를 목적으로 개신교 선교사가 미지의 땅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날 인천에 상륙한 이들은 미국 북감리교회의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북장로교회의 언더우드 선교사 세사람이었다.
그리고 한달 후 5월3일에는 북감리교회의 스크랜튼 박사가 역시 선교사로 입국하였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제물포항에 내린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상륙직후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우리는 부활절날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창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나라 백성들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그런데 아펜젤러(H.G. Appenzeller) 선교사 부부는 서울(당시 한성)의 정치적 불안 등 여러 이유에서 서울에 입성하지 못하고 4월 13일 일본 나가사키로 돌아갔으며 6월20일 재입국하여 7월 29일 서울로 입성하기까지 38일간을 제물포항에 기거하였다.
그리고 38일 동안 그는 한국어 학습, 짐이 도착한 후의 올갠 연주, 제물포항 주변 답사 등 매우 분주히 지냈으며 우리는 이와같은 점들을 들어 아펜젤러 선교사의 선교의 시발로 보고 내리교회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1891년 6월 제7차 한국선교히에서 굿셀감독(Bishop Daniel A. Goodsell)은 아펜젤러 선교사를 인천거점 즉 내리교회의 관리자로 임명하였다. 굿셀 감독의 결정으로 인천은 정동구역에서 빠지고 독자적인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사실은 미감리회 한국선교회에서 서울의 정동외에 새로운 선교지로서 「제물포 거점(Chemulpo charge)」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892년 6월 이후에는 1885년 5월에 입국하여 배재학당에서 가르치는 일과 문서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존스(G.H. Jones) 선교사가 새로운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892년 이후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한 존스와 한국인 본처 전도인들의 전도활동은 교세의 폭발적인 확장은 물론 강화, 문학산을 중심으로한 개항전의 인천 도호부를 중심으로 한 지역, 부평지역, 개항장을 중심으로한 현 구시가지와 임해도서 지역으로 구분하여 거점으로 성장하였다.
교세가 확장되자 예배처가 비좁게 되었으며 강재형의 좁은 처소에서 예배를 드리던 여자 성도들을 위하여 한국 최초로 자력에 의해 여성예배당이 건립되었는데, 한국돈 11만냥 즉 54엔이 소요되었다. 봉헌식은 1895년1월 제10차 한국선교회를 주재하기 위해 입국한 나인드 감독이 주재한 가운데 2월에 성대하게 치러졌다. 1900년 내리교회의 교인은 학습인 51명, 입교인 62명, 세례받은 아동 40등 모두 153명이었다. 교인들의 증가로 인한 예배당 건립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건축비가 다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건축설계도가 입수되는 등 어느 정도 준비가 되자 1900년 6월 24일 주일예배를 마지막으로 한국 최초의 예배당(white chapel)과 최초의 자립 여성예배당을 헐고, 제물포 용동 교회를 ‘웨슬리 교회’ 명명하였고, 새 예배당이 건축되기까지 예배드릴 장소로 예배당을 헐 때 나온 폐자재를 이용하여 우각동에 위치한 에스베리 예배당을 증축하여 1900년 8월27에 헌당하였다. 늘어나는 교인들을 우각동(현 창영동) 에즈베리에서는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존스 목사는 벽도 바르지 못한채 벽돌로 쌓아 지붕만 얹은 용동의 웨슬리 예배당으로 이전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 첫예배는 1901년 12월 크리스마스 예배로 드려졌다.
웨슬리 예배당 봉헌후 교세는 더욱 성장하여 한국 최초의 자립교회가 되었으며 당시 모든 교회의 모범이 되었으며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김기범목사를 배출하였다. 그후 발전을 거듭하며 예배장소가 비좁아 다시 웨슬리 교회를 헐고(1955년10월19일 류형기 감독 주례로 기공예배) 그 자리에 예배당을 다시 지었으나 화재로 전소하여 건축한 예배당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선교100주년 기념 성전』을 봉헌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92년 존스목사가 제물포에서의 사역을 시작할 때는 교인이 불과 2-3명에 불과하였으나 1901년 10월 30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서지방회에서 존스가 목소리 높여 ‘교회의 중심은 대한형제도 아니요 미국목사도 아니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예수라’ 우리는 모두 추수할 일꾼들이라 하였는데 웨슬리 예배당 봉헌 이후 한국에서 최초의 자립교회로서 성장하여 개항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천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우선 교회의 성장측면에서는 제물포 웨슬리 교회를 중심으로한 제물포 스테이션의 형성, 그리고 서지방을 조직한 것을 둘 수 있다. 이는 담방리(현 만수동 일대), 부평, 김포, 통진, 남양을 포괄하는 제물포구역, 강화, 교동, 송개, 영종, 덕적의 도서로 이루어진 강화구역, 그리고 황해도 지역인 연안구역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 사경회와 신학회을 조직하므로써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효시가 인천 즉 웨슬리교회(현 내리교회)에서 시작되었다.
한편 교육사업을 통하여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892년 제2대 존스목사의 부임이래 시작된 남녀 영화 매일학교(현 영화초등학교의 시작), 1899년12월부터는 소년매일학교(남학당)을 전담하게 된 권사 박능일과 안정수는 야간 기초 영어 학교를 개설하여 근대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또 한국 최초의 소년 척후대와 엡웟 청년회(일명 나인데 청년회), 여자 보호회를 조직하여 신앙뿐만 아니라 청년들에게 애국심과 이웃에게 봉사하는 정신을 고취하였다.
첫 하와이 이민을 통하여 해외에 첫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그곳에서도 독립운동 자금, 어렵게 기금을 마련하여 해방 후 인천에 그를 기념하는 대학교 즉 인하대학교를 설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성극발표, 합창대회,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 등 문화활동을 주도하였으며, 1954년 첫 메시야를 발표한 이래 현재까지 헨델의 ‘메시야’ 전곡을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예배당을 장례식장 혹은 결혼식장으로 사용함으로써 신문화 보급에도 노력하였다.
이와 같이 내리교회는 한국 기독교의 모교회로서 그리고 근대조선이후 사회발전의 한 축으로 많은 역할을 감당해 오고 있으며 년 300명이상이 교회를 방문하고 있다.
그런데 1955년 개축당시 감리교 총회의 개헌안 통과 파동 등의 여파로 인해 웨슬리 예배당을 보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개축하는 실수를 하였다. 이런 상징성과 의미를 지닌 웨슬리 예배당을 복원하고자 하는 필요성이 대두되어 수년간 노력을 경주해 왔다.
특히 웨슬리 예배당의 설계도면을 찾기 위한 노력은 물론 사진을 확대하여 벽돌 등을 계산하고, 교인들의 증언을 통하여 복원가능한 외내형의 설계도면을 작성하는 일을 병행하였다. 따라서 설계도면을 찾지 못한 현 시점에서 웨슬리 예배당의 복원은 수작업에 의한 설계도면에 의존하더라도 교회 권역 정비 방안도 마련되어 복원 예배당과 주변환경이 조화되는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 권역 정비 방안시 개신교 선교 시발지로서의 역할도 고려하여야 하며, 최근 근대 문화유산의 보존?관리가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고 있고 교회 주변의 근대 건축물과 연결하여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역사 문화 유적지를 조성한다면 그 의미는 매우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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